연담대사 유일

조선 후기의 고승. 성은 천(千)씨. 자는 무이(無二), 법호는 연담(蓮潭). 전라남도 화순출신.
5세 때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하여 10세에 <통감(通鑑)>, 12세에 <맹자>를 읽었다. 7세 때 아버지가, 13세 때 어머니가 죽은 뒤 숙부의 보살핌을 받았다.
<대학>,<중용> 등 유가경전을 공부한 뒤, 18세 때 승달산 법천사(法泉寺)의 성철(性哲)을 따라 출가하였고, 19세 때 안빈(安賓)으로부터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보흥사(普興寺)에서 사집(四集)을 배운 뒤 대둔사(大芚寺) 벽하(碧霞)로부터 <능엄경>을, 용암(龍巖) 밑에서 <기신론 (起信論)>과 <금강경>을, 취서사(鷲棲寺) 영곡(靈谷)으로 부터 <원각경(圓覺 經)>을 배웠다.

22세 때 해인사의 체정(體淨) 밑에서 3년 동안 공부하여 선리(禪理)를 터득하였고, 상언(尙彦)에게서 <화엄경>을 배우면서 28세까지 시봉(侍奉)하였다.
29세 때 강원도 장구산(長丘山)에 53불(佛)을 조성하고, 체정을 증명사(證明師)로 모셨다.
31세 때 보림사(寶林寺)에서 <반야경>과 <원각경>을, 다음해에 <현담(玄談)>을 강의하기 시작하여 60세까지 30여 년 동안 계속 하였다.

58세 때 영남 종장(宗匠)으로 해인사에 있으면서 서산(西山)의 비석을 대둔사에 세웠다.
60세 때 시기하는 승려의 투서 때문에 퇴암(退庵)과 함께 수일 동안 투옥된 일이 있었다.
78세 때 보림사 삼성암(三聖庵)으로 옮긴 뒤 80세에 입적하였다. 교학(敎學)뿐 아니라 선도를 함께 닦은 고승으로서, 법맥상으로 볼 때는 체정의 제자이고 상언을 동문이면서 스승으로 받들었다. 서산의 의발(衣鉢)을 전수함으로써 선교(禪敎)의 총본산인 해남 대흥사(大興 寺)의 12대종사(大宗師) 중 1인이 되었다.

31세 때 강석(講席)을 연 뒤 30여 년 동안 강의하면서 사집, 사교 및 <화엄현담(華嚴玄談)>, <염송(拈頌)>에 대한 사기를 저술하되 기존 사기를 면밀히 검토하여 후학들의 현혹됨이 없게 하였다.

특히, <도서(都序)>와 <법집별행 록절요병입사기(法集別行 錄節要幷入私記)>에 대하여 정혜(定慧)의 돈오점수(頓悟漸修)를 이지(理智)로 판단하여 본뜻을 잃었다고 비판하면서 호암(虎巖)의 사지현전(事智現前)으로 해석하였다.

또한 염불도 입으로만 외우지 말고 마음으로 해야 자심정토와 자성미타가 원활하게 현전(現前)한다고 하여 염불과 참선이 일치함을 주장하였다. 중생과 제불의 마음은 각각 원만하고 완전하여 원래 하나이고 총괄적인 대 실재에 귀일하며, 하나의 마음은 불생불멸 (不生不滅)하고 선악의 구별이 없으나 더럽고 깨끗한 훈습(薰習)에 의하여 선악 등이 있게 된다고 하였다.

저서로는 <서장사기(書狀私記)>1권, <도서사기(都序私記)>1권, <선요사기(禪要私記)>1권, <절요사기(節要私記)> 1권, <기신사족(起信蛇足)>1권, <금강하목(金剛蝦目)>1권, <원각경사기(圓覺經私記)>2권, <현담사기(玄談私記)>2권, <대교유망기(大敎遺忘記)>5권, <제경회요(諸經會要)>1권, <염송착병(염頌着柄)>2권, <임하록(林下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