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요대사 태능

조선 중기의 고승. 성은 오씨. 호는 소요(逍遙). 전라남도 담양출신.
어머니가 신승(神僧)으로부터 대승경(大乘經)을 받는 태몽을 꾸었으며, 태어나면서부터 살갗이 선명하고 골격이 씩씩하였다. 어려서부터 탐욕을 싫어하고 도훈(道訓) 듣기를 즐겨하였으며, 베풀기를 좋아하고 자비심이 많아 마을사람들이 성동(聖童)이라고 불렀다.
13세에 백양사(白羊寺)에 놀러갔다가 뛰어난 경치를 보고 곧 세속을 떠나기로 결심하여 진대사(眞大師)로부터 계(戒)를 받았다. 그때 부휴대사(浮休大師)가 속리산과 해인사로 다니면서 교화를 폈는데, 그 밑에서 경률(經律)의 깊은 뜻을 익혔다.
부휴의 문하에 수백의 제자들이 있었으나, 오직 소요와 충휘(沖徽), 응상(應祥)만이 법문(法門)의 삼걸(三傑)이라 불렸다. 서산대사(西山大師)가 묘향산에서 교화를 편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 : 달마대사가 천축국에서 중국으로 온 뜻이 무엇인가 를 묻는 話頭를 물었다. 서산대사는 한 번 보고 곧 건당(建幢)을 시켜 의발 (衣鉢)을 전한 뒤 3년 동안 지도하였다. 그 뒤 얼마 안 되어 서산대사는 그에게, “그림자 없는 나무를 베어와서, 물 위의 거품에 모두 살라버린다. 우스워라, 저 소를 탄 사람. 소를 타고서 다시 소를 찾는구나!”라는 법계(法偈)를 주었다.

30세 되던 해 임진왜란이 일어나 서산과 유정(惟政)이 의병을 일으켜 전 장으로 나가자, 그는 폐허가 된 빈 절을 지키며 불전(佛殿)을 수리하고 전쟁의 희생자들을 위하여 기도를 올렸다. 1624년(인조 2년) 조정에서 남한산성(南漢山城)을 축조하려 할 때 그에게 서성(西城)을 보완하게 하여 이를 완수하였다. 그 뒤 지리산의 신흥사(神興寺)와 연곡사(燕谷寺)를 중건하였는데, 태능의 도력에 감화된 사람들의 도움으로 며칠 만에 공사를 끝마쳤으며, 그가 법(法)을 설하면 짐승들과 이류(異類)들까지도 감복하였다고 한다. 그는 선(禪)과 교(敎)를 일원이류(一源異流)로 보는 전통적 견해를 취하였다.

이러한 사상과 경향은 서산대사와 일맥상통하는 흐름이다.
그의 선사상을 요약하면,
(1) 본래청정(本來淸淨)하고 자재하며 완전한 일물(一物)이 있다는 것,
(2) 이 일물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고 밖으로부터 얻어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닌 우리의 자성(自性)이라는 것,
(3) 이 자성은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 현실 속에서 모든 사물에 작용하면서도 그 스스로는 초월적이라는 것,
(4) 이 자성이 나의 참된 주인공인 동시에 모든 것의 주인이라는 것,
(5) 이 참 주인공을 철두철미하게 자각(自覺)한 사람은 무위진인(無位眞人)으로서 아무 것에도 의존하지 않으며 결점이 없는 온전한 주인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 등이다.

즉, 상징적인 비유를 통해 개념적인 지식을 초월하여 바로 그 실상(實相)을 실감하도록 하는 선종의 방법으로 제자들을 깨우치려 하였고, 철두철미하게 불교를 주체적으로 깨닫도록 가르쳤다. 1649년 11월 21일 열반이 가까웠음을 알고 제자들에게 설법하다가, 임종 때에는 붓을 찾아 “해탈이 해탈 아니거늘 열반이 어찌 고향이겠는가! 취모검(吹毛劒)의 빛이 빛나고 빛나니 입으로 말하면 그 칼날 맞으리(解脫非解脫 涅槃豈故鄕吹毛光樂 樂口舌犯鋒鎚).” 라는 임종게를 남기고 나이 87세, 법랍 75세로 입적하였다. 평소 태능의 도(道)를 흠모한 효종은 1652년(효종 3년) 혜감선사(慧鑑禪師)라는 시호를 내렸다.

저서로는 <소요당집(逍遙堂集)> 1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