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옹대종사 행장

서옹대종사 행장1

서옹대종사 행장2

3품 벼슬인 중추원 의관을 지내신 성품이 청렴하고 고매한 조부 이창진옹 으로부터 한학을 배웠다. 어려서부터 스님의 영민함은 할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함은 물론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이때 받은 훈육은 훗날 대종사께서 선교를 겸수한 가운데 맑고 단아한 인품을 지니는 토대가 되었다.
연산공립보통학교 4학년 재학 중에 집안이 서울로 올라오매 영민한 스님은 5학년 때 월반 시험을 치러 양정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17세 때 조부님과 모친께서 돌아가시자 슬픔을 다스리며 불교서적을 읽다가 무아사상에 마음이 끌렸다. 부처님의 가르침 속에 그간 고뇌하던 인생의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이 있음을 알고 불교에 깊이 빠져들었다.

불교를 알기 위해 각황사(지금의 조계사)를 찾아 중앙포교사로 계시던 대은스님을 만나 만암스님을 소개받고 만암스님께 출가할 것을 약속하고 1932년 21세의 나이로 중앙불교전문대학교에 진학했다. 그해 7월 백양사에서 만암 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석호(石虎)라는 법명을 받아 계를 받고 수행과 학업을 겸비하게 되었다.

24세 되던 1935년 중앙불교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백양사 강원에서 잠시 영어강사를 하다 2년 뒤에 오대산 한암 스님 회상에서 본격적인 수선납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두 하안거를 성만하신 서옹 스님께선 선의 실수 못지않게 선 이론의 체계적 연구가 겸수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굳히고 28세 때인 1938년 일본 선학의 명문인 교토의 임제대학으로 유학을 떠나셨다.

서옹스님은 임제대학 재학 중 선 철학의 세계적 권위자인 히사마쓰 신이찌 박사(당시 경도대학 교수)를 만나 마음과 대화를 통하는 도반이 되어 깊은 학문적 교류를 나누셨다. 2년간의 대학생활을 마칠 때 ‘진실자기(眞實自己)’라는 졸업 논문으로 당시 일본 불교학계를 주름잡던 니시타 기타로, 다나베 하지메 등 교토학파를 대표하는 학자들의 학설을 비판, 일본 불교학계에 큰 화제를 몰고 왔다. 실참을 겸하여 지성을 갖춘 선지식으로 평가받은 스님의 졸업논문은 후에 일본 여러 대학에서 교재로 쓰이게 되었다.

대학을 마친 서옹 스님은 일본 임제종 총본산인 묘심사에서 선 수행을 해보고자 혹독하기로 유명한 임제종 선원 입방식에 응시하여 힘든 과정을 불과 이틀 만에 통과하고 참선수행에 있어서도 일대 조사의 풍모를 보이자 일본인들은 서옹 스님을 부처님처럼 여기며 여불(如佛)이라고 불렀다. 스님께선 묘심사 선원에서 3년 안거를 성만하신 1944년 33세에 고국으로 돌아오셨다.

귀국 후에도 더욱 정진하시며 잠시 백양사에 머무시다 전국 각처의 선원에서 수행에 전념하셨다. 1956년에는 백양사 선원에서 안거에 들어 정진하셨고 만암 스님께서 서옹 스님에게 전법게를 남기어 법을 이으신 후에도 정암사, 해인사 선원에서 수행하시니 수행납자로서 경향 각지에 그 이름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서옹대종사 행장3

서옹대종사 행장4

제방선원을 찾아 운수행각을 통해 정안(正顔)을 활개한 조사가풍을 진작시킨 서옹 스님께서는 임제의 맥을 잇는 정통 간화선 수행법을 한국불교의 보편적 수행법으로 정착시키어 수 많은 후학들의 바른 길잡이가 되셨다.

1964년 도봉산 천축사 무문관이 세워지자 초대 조실로 모셔짐으로써 후학들에게 회향하고 나누는 스승의 길로 나서시게 된다. 그 후 동화사, 백양사, 봉암사 선원조실을 역임(無門關, 桐華寺, 白羊寺, 鳳岩寺, 禪院祖室) 하셨다.

서옹 스님께서 1974년 효봉, 청담, 고암 스님에 이어 대한불교조계종 제5대 종정으로 추대되셨다. 종정으로 계시던 시절 ‘부처님 오신날’이 공휴일로 제정된 것은 불자들의 오랜 숙원이 이루어진 일이라 하겠다.

1979년에는 백양사 운문선원 조실로 추대되어 다시 수좌들의 선 수행을 지도하시는 등 수행의 본래 자리로 돌아오셨다.

스님께서는 한국이 조사선 가풍을 재정립하고 수행전통을 사회화하기 위해 1995년 “참사람 결사 운동”을 전개하셨다. 이 운동을 수행문화 운동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1998년 백양사에서 한암 스님 이후 86년 만에 처음으로 무차대법회를 열어 세계적 불교 석학과 수행자들에게 현대문명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으로써 ‘참사람주의“를 제창하셨다.

스님께서 말씀 하신 참사람은 임제선사의 무위진인(無位眞人)을 창조적으로 해석하여 현대적 생명력을 불어 넣은 것으로 참사람을 “자각한 사람의 참모습”이라고 정의하고 이렇게 부연하셨다.”

‘참사람은 유물에도 유심(唯心)에도 무의식에도 하느님에도 불조(佛祖)에도 구속받지 아니하며 전연 상(相)이 없이 일체상을 현성(現成)하나니, 현성함으로써 현성한 것에나 현성하는 자체에도 걸리지 아니하여 공간적으로는 광대무변한 세계를 형성하고 시간적으로는 영원 무한한 역사를 창조하는 절대주체의 자각(自覺)이란 것이다.’

또한 스님께선 사회참여와 자비의 실천에도 앞장서셨다. 국가경제가 위기에 처한 IMF 때에는 ‘나라가 망하는데 수행자들이 가만히 있어서 되겠냐’고 꾸짖고 백양사를 개방하여 실직자들이 자기 성찰의 기회로 삼을 수 있도록 해주기 위해 “단기출가 수련회”를 만들어 주시기도 하셨다.

서옹 스님께선 고령에 이르러서도 형형한 안광과 카랑카랑 맑은 사자후로 여전히 대중에게 벽암록을 제창하시고 참사람 결사를 주도 하셨다. 또 일찍이 스승 만암 스님이 백양사에 처음 세우셨던 고불총림을 1996년 다시 복원하시고 초대 방장으로 추대되셨다.

한 생을 다하여 선풍 진작과 납자 제접, 그리고 인류 구원의 새로운 사상적 대안으로 참사람 실천운동을 제창하신 서옹 스님은 입적 3일 전부터 문도와 후학들에게 “이제 가야겠다”며 입적을 예고하셨고, 열반하신 당일에도 평상시처럼 운동을 하시고 입적 직전까지 시자 스님들에게 법문을 들려주신 뒤 입정에 드신 그대로 좌탈입망(座脫立亡) 하셨다. 그 날이 2003년 12월 13일, 스님께선 세수 92세, 법랍 72세를 일기로 스승이신 만암 스님의 모습처럼 결가부좌 하신 채 고불총림 백양사 설선당 염화실에서 입적하셨다.

스님의 저서로 <선과 현대문명> <절대현재의 참사람> <절대 참사람>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