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암 대종사

만암 대종사1

만암 대종사2

환응스님에 이어 근대 백양사의 제2대 주지로 부임했던 만암 종헌스님은 백양사 전체 역사를 통해 가장 돋보이는 불사를 일구어 냈던 인물이다. 뿐만 아니라 스님은 한국 근대 불교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백양사는 아직까지 만암스님의 가풍에 의해 이끌어져 오고 있다는 평가를 하여도 무방할 정도로 절에 끼친 스님의 영향력은 실로 대단하다고 볼 수 있다.

4세 때에 아버지를 11세 때에는 어머니를 여의고 고아의 처지가 되나 어려서부터 영특함을 널리 보이던 스님은 11세의 나이로 백양사의 취운도진(翠雲道珍)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불문(佛門)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이어 16세 때는 구암사(龜巖寺)의 전문 강원에 들어가 당대의 대강백 한영(漢永) 스님의 가르침을 받는다. 훗날 백양사를 거점으로 불교교육 분야에 심혈을 기울였던 스님의 사상은 이 때부터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스님은 운주암에 거주하던 백양사의 환응스님을 찾아가 수학하기도 했다.

10여 년 가까이 경전 연구에 몰두하던 만암스님은 환응스님에게 전강(傳講)을 받고 운문암, 청류암에서 강의하다 32세때인 1907년 해인사 강백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스님께선 교학에만 치중치 않고 선과 교학을 함께 닦으셨다. 백양사 선원에 돌아와 5하(夏)를 보내고 이어 운문선원에서 5하를 성만했다. 선과 교를 모두 원만성취한 스님께선 1916년 백양사에 주지로 취임하였다.

1910년 한일합방으로 민족 전체가 나라를 잃은 슬픔에 빠져 있을 때 스님은 출가도량인 백양사로 돌아와 교육사업에 매진하게 된다. 백양사 청류암에 광성의숙(廣成義塾)을 설립하고 종래의 강원제도를 혁신한 불교 교육을 전개해나갔던 것이다. 이 때의 광성의숙을 통한 교육은 당시 불교계 상황 속에서는 매우 혁신적인 것으로 평가할 수 있는데, 약 100여 명의 학인들이 모여 선과 교, 율 등을 공부하며 외전(外典)에 대한 교육도 병행하였다. 특히 학인들의 교육을 위해 출간했던 역사· 지리관계 교재는 민족정신을 고취시킬 수 있다는 이유로 일제의 심한 감시를 받았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때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백양사를 출입하였다는 사실도 만암스님의 이 같은 사상과 연계될 수 있을 것이다.

만암스님은 1917년부터 10여년에 걸친 중창불사에 착수한다. 현재의 가람 규모가 이 때의 불사를 통해 완성된 것이다. 특히 스님의 중창 불사는 철저하게 사찰의 자급자족을 주장하는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이 주목된다. 만암스님은 양봉(養峰) 또는 죽기(竹器)를 통해 불사 자금을 조달해 나감으로써 훗날 ‘반선반농(半禪半農)’의 실천자로 추앙받았던 것이다.

중창불사를 회향한 이후 스님은 불교 교육 사업에 더욱 큰 정열을 쏟게 되는데, 1928년부터 3년간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중앙불교전문학교 초대 교장직을 역임하였으며, 1947년에는 광주 정광중학교를 설립하여 7년간 교장직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백양사 중창 불사와 교육사업에 온 힘을 다했던 만암스님은 1940년대 후반부터 이른바 ‘불교정화운동’에 깊은 관여를 한다. 한영 스님에 이어 조계종 제2대 교정(敎正)으로 취임하면서 본격적 불교 정화운동을 전개해 나갔던 것이다. 한국 불교의 정화운동사는 아직도 재정리해야 할 부분이 많이 남아있는 상태지만, 만암스님의 이 무렵 행보는 비구파(比丘派) 내에서도 점진적 개혁을 추구했던 계파에 속한다. 1954년 선학원에서 개최된 ‘전국 비구승대표자회의’에서 종정(宗正)에 임명되었던 만암스님은 비구승단을 이끌며 대처승단과의 타협을 시도해 나가나 스님의 타협 노력은 무산되고 말았으며, 이 과정에서 비구승단 내의 강경파와 마찰이 생기게 되자 스님은 정화운동에서 손을 떼고 백양사로 내려왔다.

정화운동에 끼친 만암스님의 영향에 대한 평가는 앞으로도 계속 연구되어야 할 과제이지만, 여하튼 스님은 백양사로 돌아온 이후 후학 양성에 몰두하다가 1957년 세속 나이 81세, 법람 71세의 일기로 열반에 드셨다.